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청약서의 자필서명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계약서의 자필서명이 그렇듯 보험계약에 있어서도 청약서 자필서명은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 일단 서명을 하고 나면 그 문서에 기재된 내용을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서명한 자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통상 보험을 가입할 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약서 기재 내용은 읽어보지도 않은 채 설계사가 서명하라고 일러주는 곳에 아무런 생각 없이 사인을 그어댄다. 심지어 계약자와 피보험자의 인적사항, 보험기간, 보험료 납입기간, 보험가입금액, 특약 내용, 보험료 등이 일체 기재되어 있지 않은 백지 청약서에 사인을 요구해도 그냥 해 준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용이 기재되지 않는 청약서에 자필서명을 해주는 것은 타인에게 백지수표를 마구 남발하는 것과 진배없다. 위험천만한 일이다. 백지수표를 교부받은 자가 얼마를 기재하든 수표를 교부해준 자가 전부 책임져야 한다.
보험계약도 마찬가지다. 설계사가 계약자의 서명을 받은 백지 청약서를 영업소로 가지고 가서 계약내용을 자기 맘대로 기재하더라도 계약자는 나중에 할 말이 없다. 나는 아무런 내용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백지 청약서에 서명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여도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 법정싸움으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계약자가 기재내용을 다 확인한 다음에 사인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청약서의 자필서명 란 왼쪽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험설계사로부터 계약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 들었으며, 보험약관을 교부받고, 보험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 들었으며, 이에 청약의 의사표시로서 보험계약자, 피보험자가 자신의 자필로 서명합니다.”
위 청약서 문구 때문에 계약자가 일단 자필서명을 하고나면, 실제로는 계약내용을 설명 듣지 못했고 약관도 교부받지 못했을지라도 교부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백지청약서에 서명을 받아가서 설계사가 자기 맘대로 계약내용을 기재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백지청약서에 함부로 서명한 자가 치러야 할 고통이다. 백지 청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가 있거나 백지청약서에 서명만 받아 갔다는 설계사의 자필확인서가 있다면 예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청약서의 자필서명은 함부로 해 줄 일이 아니다. 설계사로부터 보험약관도 교부받고, 설계사의 설명내용이 약관의 내용과 일치하는지 확인도 해보고, 내가 원하는 보험인지도 확인해본 다음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때에만 서명하기 바란다.
자필서명과 관련하여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항이 있다. 사망보험을 가입하면서 계약을 체결하는 계약자와 보장을 받는 피보험자가 다른 때이다. 사망보험이란 피보험자가 상해나 질병으로 죽었을 때 단 돈 1,000만 원이라도 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보험을 말한다. 이때 피보험자의 자필서명을 피보험자가 하지 않고, 계약자나 설계사 등 타인이 대신하는 경우에는 그 보험계약은 무효라고 상법에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규정을 둔 취지는 피보험자가 모르는 가운데 사망보험에 가입되고, 계약자가 사망보험금을 편취할 목적으로 피보험자를 몰래 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보험 제도를 악용하고자 하는 도덕적 위험을 사전에 엄격히 차단하기 위함이다. 무효인 계약은 수 년 또는 수십 년이 경과했더라도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다. 계약 체결일로 소급하여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계약이 무효가 되면 보험회사는 그동안 계약자가 납입한 보험료 원금만 돌려 줄 책임이 있을 뿐 사고발생시 보험금 지급책임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무효인 계약을 체결한 계약자가 보험회사에 전화를 하여 무효를 주장하고 그동안 납입한 보험료를 전부 돌려달라고 말하면 보험회사들이 순순히 보험료를 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보험회사는 이렇게 말한다. 계약을 체결할 때 피보험자가 서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피보험자가 지금 자필서명을 다시하면 아무런 문제없다고. 하지만 백 프로 거짓말이다. 그런 말에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계약의 무효를 인정하면 그동안 잘 들어오던 보험료 수입이 중단되기 때문에 아까워서 하는 소리일 뿐, 피보험자가 자필서명을 정정해도 정작 피보험자가 훗날 사망하면 보험회사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그때는 다른 말을 내뱉는다. 일단 보험계약이 무효가 된 이상, 피보험자가 서명을 정정했다 하여 유효계약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험회사 말은 보험료 받을 때 다르고, 보험금 줄 때 다르다. 그래서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 독자는 명심하기 바란다. 타인의 사망보험을 가입하면서 피보험자인 타인이 계약을 체결할 때 자필서명을 하지 않은 계약은 영원히 무효라는 사실을.
다만, 피보험자가 죽어도 사망보험금이 한 푼도 지급되지 않는 보험은 피보험자가 서명을 안 했어도 무효가 아니다. 사망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 보험은 전문용어로 생존보험이라고 하는데, 생존보험은 사망보험금이 지급되지 않으므로 계약자가 고의로 피보험자를 살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망보험일지라도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동일한 사람인 때에는 타인의 사망보험이 아니고, 자기의 사망보험이므로, 피보험자의 서명을 계약자가 하든, 계약자로부터 위임받은 타인(보험설계사)이 하든 상관없다. 만 20세 미만의 자녀를 피보험자로 하는 사망보험의 경우에도 계약자인 부모가 자녀를 대신하여 서명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 15세 미만자, 심신상실자, 심신박약자를 피보험자로 하는 사망보험은 절대로 가입할 수 없고, 가입했다면 그들이 서명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무효가 된다. 어른이나 정상인들이 어린 아이나 심신이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을 사망보험에 가입시킨 후 사망보험금을 편취할 목적으로 그들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법 제731조 1항은 타인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계약은 계약을 체결할 때에 그 타인의 서면에 의한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타인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계약이란,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사망보험계약을 말한다. 계약자는 보험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보험료 납입의무를 지는 자를 말하고, 피보험자는 보장받는 대상자를 말한다고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사망보험계약이란 피보험자가 사망하였을 때 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보험을 말한다. 따라서 피보험자가 죽어도 사망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 보험, 즉 입원비 일당이나 의료실비만 지급되는 보험이라면 그 보험은 사망보험계약이 아니다. 상법의 이 규정에 따라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사망보험계약에서 계약을 체결할 때 피보험자가 청약서에 자필서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 보험계약은 무효가 된다. 무효란 애초 보험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과 같아서 어떠한 보장도 받을 수 없다. 다만,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를지라도 피보험자가 사망하였을 때 사망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 보험은 피보험자가 자필서명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유효하다. 상법에 이러한 규정을 둔 취지는 타인 몰래 사망보험을 가입한 후 사망보험금을 탈 목적으로 타인을 살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도덕적 위험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정의이다. 상법 제731조 1항에서의 타인이란 가족이 아닌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계약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전부 타인이다. 배우자도 타인이고 부모도 타인이고, 형제자매도 타인이다. 따라서 계약자가 나라면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타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계약자는 남편이고 피보험자는 부인인 사망보험에서 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부인이 직접 피보험자 자필서명을 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계약자는 형이고 피보험자가 동생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계약자는 부모이고 피보험자는 20세 미만의 자녀일 때에는 다르다. 계약자인 부모가 미성년인 자녀를 대신하여 서명해도 무관하다. 하지만 자녀가 만 20세 이상 성인일 때는 부모가 서명해서는 안 되고 자녀가 직접 서명하여야 된다.
무효인 보험계약은 계약 체결일로 소급하여 무효이므로 보험사고가 발생했더라도 보험금을 한 푼도 지급받을 수 없다. 한번 무효인 보험계약은 계약 체결일 이후에 피보험자가 자필서명을 정정 또는 보완했다 할지라도 무효이기는 마찬가지다. 피보험자가 자필서명을 정정 또는 보완했기 때문에 무효계약이 다시 유효계약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무효 계약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주위에서 부지기수로 체결되고 있다.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사망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체결 장소에 계약자, 피보험자 두 명이 같이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계약자, 피보험자가 각자 자신의 서명을 직접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약체결 장소에 계약자만 있고 피보험자가 없을 경우이다. 이럴 때 보험설계사가 피보험자의 자필서명에 대한 중요성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조금 번거롭더라도 청약서를 놔두고 갈 테니까 피보험자가 자필로 서명하고 나면 연락을 주라, 그러면 내가 다시 와서 청약서를 가져가겠다고 말하면 되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계약자가 변심하기 전에 오늘 당장 계약을 체결하고자 하거나 재방문 하는 것이 귀찮으니까 계약자가 피보험자의 서명을 대신 하여도 무관하다고 설계사가 무책임한 말을 함으로써 무효계약이 체결되고 있다.
“부부니까 남편이 부인의 서명을 대신 하여도 상관없다.”
“부자지간이니까 아버지가 아들의 서명을 대신 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형제들이니까 형이 동생의 서명을 대신하여도 괜찮다.”
설계사의 이런 말은 다 거짓말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런 거짓말에 속아서 무효계약을 체결하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바란다.
부인이 남편을 피보험자로 하여 계약을 한 건 체결하고 싶은데, 남편에게 보험가입 사실을 알리면 보험인식이 안 좋은 남편이 팔팔 뛸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남편이 자필서명을 거절하여 보험청약이 무산되면 보험설계사는 보험 모집수당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설계사는 어떻게 해서든 계약을 성립시켜서 돈 벌 욕심에 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부인이 남편 모르게 남편의 서명을 대신 하여도 문제가 없다고.
계약자가 자신을 피보험자로 하여 사망보험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즉 계약자, 피보험자 모두 나로 하여 체결하는 사망보험계약은 내가 설계사에게 구두로만 청약 의사를 밝히고, 계약자, 피보험자의 자필서명은 설계사가 대신 하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청약의 의사표시는 구두로 하여도 효력이 있고, 타인의 사망보험이 아니므로 피보험자가 직접 서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설계사가 계약자, 피보험자의 자필서명을 대신 하면서 청약서의 ‘계약 전 알릴 의무사항’ 답변까지도 대신 기재하면서 알려야 할 사항을 알리지 않았거나 사실과 다르게 알렸다면 고지의무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지의무 위반이란 계약자 또는 피보험자의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하여 알려야 할 사항을 알리지 않거나 사실과 다르게 알린 것을 말하는데, 설계사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그런 것이므로 고지의무 위반이 절대로 아니다. 따라서 훗날 보험회사가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거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다투어야 한다. 법정에서 필적감정촉탁을 하여 계약 전 알릴 의무의 답변이 설계사의 필적이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계약자가 반드시 승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사망보험에서 피보험자가 청약서에 자필로 서명하지 않아 계약이 무효가 되어 사고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험금도 수령하지 못한 때, 계약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다음 사례를 잘 읽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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